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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깨달음은 자연의 이치와 같은 무심의 경지   2016-05-22 (일) 16:59
글쓴이 보문사   3,441



 깨달음은 자연의 이치와 같은 무심의 경지

 

 

지난 호에 이어 제 14분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 모든 상相을 여읠 때 적멸에 들 수 있다.)을 설명하고자 한다. 부처님이 살아계신 동안 설법을 듣고 반야를 얻어 행복하게 살 수 있듯이 부처님 당시가 아닌 500년 후 중생들도 ‘금강반야바라밀경’을 받아 지녀 봉행한다면 지혜를 얻어 제일 희유한 자가 될 것이라고 가르치는 내용이다.

 

하이고 차인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수자상

何以故 此人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相

소이자하 아상 즉시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所以者何 我相 卽是非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하이고 이일체상 즉명제불

何以故 離一切相 卽名諸佛

 

왜냐하면 이런 사람은 아상이 없으며 인상도 없으며 중생상이 없으며 수자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까닭은 아상이 곧 상이 아니며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일체의 상을 여읜 사람을 이름하여 제불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금강경’을 통해 4상相을 없앤다면 부처님시대와 조금도 다를 바 없이 깨달음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을 일깨우고 있다. 부처님 당시와 마찬가지로 후세사람들도 4상을 여읜다면 반야를 가진 제불諸佛이기 때문이다. 제불은 모든 부처 가운데 각각의 모든 부처를 뜻하는 것이다.

불교의 핵심은 4상이다. 4상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다. 아상은 주관, 인상은 객관, 주관과 객관이 나누어져 공존하는 것이 중생상이다. 그 중생상에서 인간이 다른 생명체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수자상이다. 오늘날 우리는 사량 분별로 4상에 잠겨있기 때문에 반야성이라는 지혜가 샘솟지 못하고 있다. 부처님 당시라야만 부처님 설법을 듣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에도 4상을 여의고 4상에 집착을 일으키지만 않는다면 반야를 가진 제불이라는 것이다. 이 얼마나 심오한 이치가 ‘금강경’에 담겨 있는가.

야부스님은 이러한 경지를 ‘심불부인 면무참색 心佛負人 面無?色’이라고 읊었다. ‘마음에 사람을 버리지 않으니 얼굴에 부끄러운 빛 없네.’ 라는 뜻이다. 차별상이 없어야 부처이므로 4상이 없는 자가 바로 얼굴에 부끄러움이 없는 자라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는 자기를 잃어버린 사람이다. 본마음인 부처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자기만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동일생명체同一生命體임을 깨닫는 것이다. 깨달음을 통해 내 것이라는 집착에서 벗어나 모두가 함께하는 즐거움을 나눌 때 진실한 삶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살아가는 방법과 살아가는 길은 다를지라도 죽으면 모두 한 생명체, 본래 부처의 자리로 돌아간다. 그것이 환지본처還至本處이다. 그러한 생각을 갖고 산다면 외형에 집착하여 본심을 잃어버리지 않고 진실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현실을 살아가면서 명분과 명예를 얻는다할지라도 그런 것들에 너무 집착해서는 안 된다. 상에 대한 집착을 여의고 반야(깨달음)의 삶을 살도록 해야 한다.

깨달음은 공덕을 쌓아야만 이루어진다. 원인 없는 결과가 없듯이 깨달음은 그냥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공덕을 지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덕을 쌓을지라도 공덕을 쌓는다는 생각마저도 버려야 진정한 공덕이 될 수 있으며 공덕을 쌓되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것이다.

야부스님은 그러한 점을 설명하기 위해 한편의 선시로 노래하고 있다.

 

구죽생신순 신화장구지 舊竹生新筍 新花長舊枝

우최행로객 풍송편범귀 雨催行路客 風送片帆歸

죽밀불방유수과 산고기애백운비 竹密不放流水過 山高豈?白雲飛

 

묵은 대나무 새순 나고

새 꽃에서 묵은 가지 자라네

비는 나그네를 재촉하고

바람은 조각배를 돌아가게 하네

대숲이 빽빽해도

물 흐르는 데 장애롭지 않듯

산이 높다한들

구름이 나는데 장애 되겠는가

 

이는 무심無心의 경지를 노래한 것이다. 대나무는 베어내야 새순이 나오고 꽃은 묵은 가지에 의지해서 피어난다. 무심으로 바람이 불면 돛단배는 무심으로 바람을 타고 가듯 무심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러한 무심의 경지가 바로 4상이 없는 경지이며 반야를 가지고 살아가는 삶이다. 무심은 대숲에 물이 흐르듯 높은 산 위에 구름이 흘러가듯 장애롭지 않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것이 반야이며 반야의 삶은 상이 있는 현상의 모습 속에서 상에 집착하지 않고 무심으로 사는 것이다. 너무나 자연적인 모습이며 상이 있는 가운데 상이 없는 마음의 작용이라 할 것이다.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 연속적으로 이어지고 있지만 우리는 반복되는 생활 속에서도 영원히 변화되지 않는 도리를 깨달아야 한다. 육신은 소멸할지라도 영원히 소멸되지 않는 이치와 육신의 소멸은 변화일 뿐임을 깨달으려면 ‘나’라는 고집이 없어야 하고 4상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 ‘나’라는 집착에서 오는 아상은 만 가지 분별심을 일으켜 반야의 눈을 멀게 한다. 변화하는 자연 속에서 변화하지 않는 묘유妙有를 찾게 되면 묵은 대숲에서 새순이 나고 향기로운 꽃들이 필 때마다 나뭇가지가 크는 조화의 미를 터득하게 된다.

우리가 중생이라는 유한한 육신으로 무한한 부처의 향기를 발하기 위해서는 인고忍苦의 정신없이는 안 된다. 진흙 속에서도 물들지 않는 연꽃을 불교의 상징으로 삼는 것도 그 때문이다. 현재의 육신을 갖고 참 부처로 살아야 하며 사바세계 속에서 극락을 만들라는 의미이다. 변화하는 자연 속에서 변하지 않는 이치는 지난봄과 올 봄은 분명 다를지라도 봄이 되면 어김없이 꽃이 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꽃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피어나면 또다시 지게 된다. 그렇듯 우리 인간의 몸도 자연 생명의 한 부류라고 보는 것이 반야이며 지혜(반야)는 복잡다단한 삶 속에서 이를 극복하고 즐거운 삶을 살 수 있게 해 준다.

일체 상을 여의면 곧 부처라 하였으니 일체의 상을 통해서 일체 상이 아닌 도리를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상을 떠나서는 참 도리를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불고 수보리 여시 여시

不告 須菩提 如是 如是

약부유인 득문시경 불경 불포 불외 당지시인 심위희유

若復有人 得聞是經 不驚 不怖 不畏 當知是人 甚爲希有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그렇고 그렇다. 만약 다시 어떤 사람이 이 경을 얻어 듣고 놀라지 않고 두려워 않고 겁내지 않으면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심히 희유함이 될 것이니라.

 

4상에 대한 집착을 버리면 본래 가진 바 없고 주장할 바도 없으니 놀랄 일도 두려워할 일도 없다. 현실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도 물질적 가치관과 정신적 가치관이 공존하는 가운데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지혜다. 분별하는 분별지가 아닌 참 지혜를 가져야 한다. 희유함이란 그러한 참 지혜를 가진 것을 의미하며 중생가운데 출중한 모습이라 할 것이다. 사랑하고 미워하는 일도 겁내고 두려워하는 일도 자기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니 그러한 분별의 생각, 그런 분별이 없는 생각 모두 자기 마음속의 집에서 나온 것임을 알아야 한다.

야부스님은 그러한 천차만별의 마음이 작은 털구멍으로 바닷물을 삼킬 수도 있고 작은 개자씨로 수미산이 들어갈 수도 있다고 표현했다. 최미최대最微最大는 본래 둘이 아닌 것이다. 가장 작은 것으로 큰 것을 포용하는 이치는 반야지로써 알 수 있으며 반야지는 분별에 휩싸이지 않는다. 달은 언제나 둥글게 떠 있고 하늘의 맑은 달빛은 어디에서나 온 우주를 훤히 비춰준다. 그러나 달의 모양이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한 것은 달이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지구의 위치가 변하기 때문이며 고루 비춰주는 달빛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은 보는 각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마다 갖춰진 성천性天(지혜의 성품)은 동서남북 방위의 분별도 없다. 그러니 놀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은 둥근 달빛이 온 사물을 편안하게 비추는 것과 같은 여여한 마음이라 할 것이며 자연을 따르고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바로 부처의 마음이라 할 것이다.

 

하이고 수보리 여래설 제일바라밀 즉 비제일바라밀 시명제일바라밀

何以故 須菩提 如來設 第一波羅密 卽 非第一波羅密 是名第一波羅密

 

왜냐하면 수보리야 여래가 제일 바라밀이라고 말한 것은 제일 바라밀이 아니며 이름이 제일 바라밀이라고 할 뿐이니라.

 

바라밀은 바라밀이 아니라고 한 것은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름이 바라밀일 뿐이라며 긍정과 부정을 포용하여 조화를 이루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것이 참 지혜이며 바로 상이 상 아닌 도리를 나타내는 것과 같다. 불교의 공사상空思想도 그냥 텅 빈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허공가운데 땅과 하늘이 공존하여 하나로 보는 것이며 형상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되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바라밀은 반야심(향상向上), 바라밀이 아니라고 한 것은 분별심(향하向下)을 뜻한다. 부처님은 바라밀을 말씀하시고 바라밀이 아님을 말씀하심으로써 모든 중생을 포섭하기 위해 반야의 문을 활짝 열어 놓은 것이다. 쉽게 점할 수 없고 도달할 수 없는 반야심 향상과 쉽게 미치고 점할 수 있는 분별심 향하를 구분한 것이 아니라 두 손으로 나누어서 보여주는 것(양수분부兩手分付)이며 팔방으로 통하는 원통보문圓通普門인 것이다.

야부스님은 이러한 점을 한편의 선시로 부연 설명하고 있다.

 

시명제일바라밀 만별천차종차출 是名第一波羅密 萬別千差從此出

괴면신두대면래 차시막도불상식 傀面神頭對面來 此時莫道不相識

 

이름하여

제일 바라밀이여

만별천차가

이로 쫓아 나왔네

귀신 얼굴 귀신 머리

대면해 오니

이 때를 서로가

알지 못한다 하겠는가

 

제일바라밀은 사람마다 현로現露하는 반야를 말한다. 萬別千差도 본래 참 지혜(반야)에서 나온 것이다. 반야는 평소에는 잘 나타나지 않고 측량하기 어렵지만 어떤 문제를 해결할 때 샘솟는다. 그러므로 또렷이 작용하는 바라밀(반야)을 모른다 할 수 없으며 본래 나누어진 게 아니라는 것이다.

야부스님은 온갖 차별상이 두두頭頭 속에 나타나는 바라밀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알게 된다면 진상眞相을 구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중생과 부처도 둘로 나누어 진 게 아니라 본래 하나인 것이다.

우리네 인생은 도중道中이다. 길 가는 나그네에 비유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다양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지만 나그네처럼 하룻밤을 잠깐 쉬어가는 것이다. 참 부처는 가리사家離事 중생은 도중사道中事이다. 도중사에서 가리사의 장애를 받지 않고 가리사에서 도중사의 장애를 받지 않는 사람은 문수(지혜)보살과 보현(실천)보살이 좌우에서 받쳐준다. 그러나 보현행원은 문수에서 나오는 것이며 문수지혜는 보현으로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따로 분리될 수 없다. 문수 보현을 하나로 꺼내 쓰는 그런 사람은 본분자리(부처)인 비로자나 광명 속에서 봄바람에 미소를 짓듯 여유롭게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무관세음보살 ()()()

안녕 18-11-25 02:08
 
멋진 글 접할 수 있게 해주셔서 너무나 감사 말씀 올립니다..

안 보이는 것이 여러분의 진짜 몸이다 
하루일하지 않으면 하루 굶는다-백장스님 
 
 
인천광역시 강화군 삼산면 매음리 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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